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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해결점
      탁지원 현대종교 소장       무조건 맹종을 요구하는 목회자나 맹종이 순종이란 언어로 둔갑하여 그것을 축복의 비결이나 미덕으로 미화시키는 신도들이 있는 교회는 인간의 독재적인 교회이지, 하나님이 바라는 참된 의미의 교회는 아니다. 다스리는 이는 하나님이요! 다스림을 받는 이들은 인간이어야만 한다. - 고 탁명환 소장 -   해 결 점 1   민식이와 하준이 법, 그리고 김용균 법 등의 제정을 촉구하는 운동이 밀물처럼 일고 있다. 비록 당사자들은 떠나고 없지만 다시는 안타까운 일들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숭고한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제정 촉구의 법안 중 어느 것 하나도 통과되지 않는 것이 없길 바라며, 그 외 세월호 사건처럼 미제 사건들 역시 올해에는 모두 명명백백한 결론이 있길 소망해 마지않는다.   차제에 이단 피해자들이 외쳐왔던 ‘유사종교 피해방지 특별법’ 등의 관련법들도 제정 바로 앞에까지 만이라도 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그것이 어려운 이유는 이 나라 종교의 자유엔 사이비 종교의 자유까지 포함되는 등 종교 관련 부분은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성종교든 이단 종교든지 간에 종교로 인한 다수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관련 부처나 부서에서 최소한의 노력과 관심은 가져야 하지 않나싶다.   이에 본지는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으나 조금의 성과라도 기대하며 할 수 있는 한 조금씩이라도 살펴볼 것들 잘 살펴 볼 수 있는 한 해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 위의 가족들을 생각하니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 일부 이단 피해자들이 가족의 문제가 해결됨과 동시에 이단 문제에 대해 문을 닫고 살아가고 있어서다.   이단만 생각하면 지긋지긋하다는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위의 민식이 부모나 김용균씨의 어머니처럼 자식은 떠났어도 또 다른 자식의 희생을 걱정하며, 추운 겨울 국회로, 현장으로 나서고 있는 것을 보니 비교하지 않으려야 안 할 수가 없다.   해 결 점 2   ‘우리는 쉬는 것을 미안해합니다. 손님한테, 상사한테, 동료한테 그리고 독자에게 그렇습니다. 뭘 성실히 한다거나 책임감 있다는 말은 쉬지 않고 일하거나 쉬더라도 적게 쉬고 일하는 것과 같아지곤 합니다. 지금도 그런 열심과 성실의 정의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모 주간지 광고 지면에 담긴 글이다.   주간지나 월간지든 간에, 종교 잡지나 세상 잡지 등 언론에 몸담은 이들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쉼’이나 ‘재충전’, ‘안식년’ 같은 단어는 언론인에겐 어쩌면 사치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그러니 본지 직원들에게 ‘종합병원’이란 별명이 달린 것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오래전 본지의 사역을 걱정하던 노 목사께서 “사역을 100m 달리기로 생각 말고, 마라톤으로 여겨야지만 오래갈 수 있다”라고 했을 때 젊은 육신은 교만했다. 귀담아듣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단과의 영적 전투를 마라톤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거리 경기 정도의 수준으로 생각하고 일했어야 했음을 후회하고 있다. 직업병인지 자격지심인지 일과 후 외식을 한다든지 영화를 본다든지 하는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때 누군가와 우연히 만날 때면 그 당연한 ‘누림’과 ‘쉼’에 당당해야 했는데 왜 미안함을 느끼며 지내왔는지 모르겠다.   공적인 일을 벗어난 모든 때를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다. 죽어라 일하는 것이 이단과 싸우는 사람들의 당연한 덕목이 되어야 하고, 그 기대와 바람이 결국 잠시의 ‘쉼’도 허락되지 않는 무언의 지배가 되고 있다.   그래서 소망한다. 올해는 본지의 직원들이 당연하고 당당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 좀 더 많아지길, 일에 충실한 만큼 가정과 취미 생활에 있어서도 좀 더 충실했으면 하는 바람도 물론이다.   노동부에서 권고하는 쉼을 넘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일과 쉼을 적절하게 분배할 수 있는 지혜가 늘 함께하길 바라며, 빨리 달리는 것보다 오래도록, 건강하게 잘 달리는 한 해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올해는 분쟁 없는 훈훈한 교회의 소식만 들려오길 바란다.   성도들은 목회자를 존경하고, 목회자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으로 잘 양육하여 아름답고 근사한 교회를 이뤄가길 바라며, 아울러 성도 간에 섬김과 나눔이 이단 대처의 근본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길 소망한다.   현대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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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7
  • [신학] 가정도 포기하는 이단, 소유에 집착하는 교회에게 묻다
    탁지일교수(현대종교 이사장 겸 편집장)       이단연구를 하면서 늘 궁금한 점이 하나있다.   다소 불만이 있더라도 안락하고 안전한 가정과 교회에 머무는 편이 훨씬 이득일 것 같은데, 왜 굳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고) 불편하고 불안전한 이단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차라리 (확실한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도 졸업하고, (부자가 되기는 어려워도) 직장도 계속 다니고, (그다지 만족스럽거나 행복하지는 않아도) 가정에 남아있으면, 평범하고 무난한 삶을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학업과 직업과 가정을 냉정하게 팽개치고 스스로 이단에 찾고, 그 안에서 고집스럽게 머무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어떤 명분이 이런 불합리한 선택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일까?   물론 이단들이 가지고 있는 ‘미혹의 기술’인 마인드컨트롤(mind control)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사이비종교문제 전문가인 스티븐 하산(Steven Hassan)은, 사이비종교에 빠지는 이유가 마인드컨트롤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마인드컨트롤이란, 한 사람의 정체성에 혼란을 주는 동시에, 새로운 정체성으로 바꿔 놓는 시스템이라고 정의하고, 이를 “BITE Model”이라는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Steven Hassan, Combatting Cult Mind Control, 1988).   첫째는, 생활통제(B, Behavior Control)이다.   사이비종교는 신도들에게 헌신을 요구하는 한편, 소소한 일상의 자유생활까지도 치밀하게 통제한다. 정기적인 교리교육을 빙자해 시간을 통제하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포교활동을 통해 정신을 통제하고, 끊임없는 지시와 명령을 통해 선택의 자유마저도 통제한다.   둘째는, 정보통제(I, Information Control)이다.   인간은 정보를 통해 삶의 균형과 방향을 잡는다. 반면 정보의 통제는 객관적인 사고와 판단, 그리고 비판의식을 마비시킨다. 언론매체와 인터넷을 통한 정보습득을 악(惡)한 것으로 규정하고, 오직 이단 교리와 지도부의 지시에만 복종하도록 만든다. 가족과 지인들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정보마저 통제된 상황이라면, 결국 이단에 모든 것을 맡기는 무기력한 존재가 되고 만다.   셋째는, 사고통제(T, Thought Control)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을 제한하고, 교리교육을 통해 사고의 통제를 강화한다. 교회의 성경공부를 통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만, 이단들의 성경공부를 통해서는 신격화된 이단지도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의 통제는 결국 비상식적인 신격화를 수용하게 만든다. 이단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는 눈을 바꿔버린다. 결국 성경의 어떤 내용을 읽어도, 이단의 논리에 빠져, 이단의 눈으로 자신과 주변을 바라보고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넷째는, 감정통제(Emotional Control)이다.   신도들은 죄의식과 위기감을 반복적으로 교육받으며, 교주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배우게 된다. 성공하는 교주는, 자신이 얼마나 신격화된 존재인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신도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가르친다. 신도가 점점 죄인이 되어갈수록, 그 죄를 지적하는 이단지도자는 점점 영적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종말론적 위기감의 조성은, 개인의 감정을 요동치게 만들고, 위기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가정과 교회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게 만든다.     마인드컨트롤을 통해 사이비종교에 빠지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마인드컨트롤로부터 회복되는 것이라고 스티븐 하산은 강조한다.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 그리고 이를 통해 가정과 교회를 회복하는 일이 이단대처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사이비종교문제에 있어서 정죄와 분리보다, 치유와 회복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이단들이 가지고 있는 ‘미혹의 기술’과 함께, 우리 가정과 교회 안에 원인을 제공하는 요인들이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감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다.     먼저, 교회지도자들의 비상식적이고 부정직한 모습이, 상식적이고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에게로 내모는 것은 아닐까?   겉으로는 거룩한 목소리와 점잖은 모습으로 대중 앞에 스스로를 노출하지만, 속으로는 명예와 이권에 연연하며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을 ‘연합’으로 미화하고 합리화하면서, 세속정치인 못지않은 눈속임과 술수에 능수능란한 교회정치세력들의 모습이 싫어, 차라리 기성교회를 거칠게 비판하는 이단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 이단을 찾는 것이 아닐까?   둘째로, 아무리 노력해도 소위 흙수저밖에 잡을 수 없는 (불평등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하루하루 겪는) 청년들이, 주어진 운명을 천지개벽하듯 바꾸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이단을 찾는 것은 아닐까?   청년실업문제가 고통스럽다고 하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조차 제시하지 못하는 기성세대 지도자들이 가득하고, 청년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하면서도 재빠른 손익계산으로 자기 잇속만 차리는데 능숙한 정치인들이 판치는 세상을, 한 번에 뒤집어 바꿔버리고 싶은 욕구가 청년들로 하여금 이단에게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셋째로, 밖으로는 평안하고 평온한 집으로 비춰지지만, 실제로는 통제와 차별과 폭력과 무료함이 곳곳에 숨어있는 집이라면, 그래서 하루하루 탈출을 모색하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들이 있다면, 그러던 중 집에서 결코 느끼지 못하는 정과 돌봄을 이단단체 안에서 경험한 후, 차가운 집을 떠나 따뜻하고 푸근한 이단의 품을 찾으려는 이들이 있다면, 이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혹시 불만족스러운 가정에서 불편하지만 안전하게 사는 것보다, 설령 이단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행복과 따뜻함을 느끼며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이단이 문제라면, 교회가 답이라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이단 피해가 문제라면, 가정 회복이 답이라는 믿음에도 변함은 없다.   2천년 교회역사에서, 이단은 예외 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해왔지만,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단 한 차례도 넘어지지 않고 승리해왔던 것도 분명히 기억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이단들에 대한 최후의 승리는 우리 주님의 것이라는 점도 믿는다.   하지만 교회가 더 많은 소유와 양적성장에 집착하는 동안, 가정을 버리면서까지 이단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해가는 교회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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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19-12-02
  • [신학] 교회가 정죄한 이단, 사회가 외면한 교회에게 묻다
    탁지일교수(현대종교 이사장 겸 편집장)       사회적 위상과 공신력이 약화된 한국교회의 이단규정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회의 납득할만한 이단규정에 대해, 이단들은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이단규정의 공정성을 운운하며 물타기를 시도하고 있다.   과연 사회가 외면한 교회의 이단규정은 정말 문제가 있는 것인가? 이단규정 주체인 교회에게 문제가 있다면, 이단규정에도 문제가 있는 것인가?   사실 한국교회를 향한 한국사회의 날카로운 비판에 대해 일면 감출 수 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적어도 무관심의 단계는 아니라는 안도의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교회의 사회적 순기능을 기억하는 한국사회는, 교회에 대해 사회윤리적인 면에서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있다. 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을 경우, 사회는 교회를 향해 항상 냉정한 경고의 목소리를 거침없이 보낸다.   소셜네트워크가 발달한 오늘날은 더욱 그렇다.   교회가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스스로의 개혁으로 응답하지 않으면, 교회는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는 교회사의 변함없는 교훈이다.   이단규정의 ‘주체’인 교회가 사회의 비판에 직면해 있는 반면, 그 ‘대상’인 이단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감춘 채) 친사회적인 봉사활동을 펼치며 사회적 공신력을 얻기 위해 애쓰는 것이 오늘날의 형세이다.   교회의 이유 있는 이단규정에 대해, 이단들은 상식과 형평성을 내세우며 “너나 잘하세요!”라고 교회를 향해 비아냥거린다.   게다가 다종교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이단들의 사회봉사활동이 진심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   단지 사회봉사라는 행위와 그 결과에 관심을 갖는다.   아마도 종교적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사회의 당연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기독교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영남이나 제주 지역에서의 이단대처는, 주변 사회로부터 교회 내의 밥그릇 싸움 정도로 인식되기도 한다.   아무리 고상한 성경적 가르침이라고 하더라도 행함과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고, 반면 아무리 비성경적인 이단이라고 하더라도 이타적인 봉사활동이 사회에 노출될수록, 주변 사회의 긍정적인 평가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사회 정서이다.   교회가 정결한 모습으로 새로워지고 개혁되지 않으면, 이단대처의 명분과 영향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주객전도 현상은 한국교회 이단규정의 영향력, 공신력, 구속력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지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만약 교회가 ‘이기적’이고 이단이 ‘이타적’이라면, 교회의 이단 규정을 주변사회가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단지 교회의 역사가 더 길고, 양적으로 더 우세하다는 힘의 논리만을 가지고, 교회가 이단을 정죄할 수 있을까?   만약 교회가 정통이라는 우산아래에 몸을 피하고,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정통신앙의 이름으로 합리화 한다면, 이단규정의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를 어려울 수 있다.   빛과 소금의 삶을 사는 교회만이, 종교적 다양성과 관용의 시대에 뿌리내리는 이단들의 도전에 당당하게 응전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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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1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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