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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주님보다 더 큰 위로자는 없다
    김용의 선교사 (순회선교사. LOG미션 대표)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양의 운명은 오직 목자의 손에 달려있다. 주님이 나를 푸른 초장과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평생 사는 날 동안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그분 안에 안식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주님은 내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나의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   주님께서 다 보장하신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다   솔직히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두려워서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때마다 걸어갈 힘을 주시고 넘어지면 일으켜 주시고 혼자 못하면 돕는 손길을 붙여주시는 주님을 믿으면 갈 수 있다.   다윗은 일평생 아무도 그와 함께 한 사람이 없었다. 친구도 그를 배신했다. 죽음에 내몰려 쫓겨 다니며 광야 한 귀퉁이라도 자기 땅 하나가 없었다. 어떤 때는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도망했고 내일을 보장하고 산 날이 없었다. 그런데 그 모든 순간 그는 말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   메마른 광야 여기저기로 피해 다니며 주리고 목마를 때도 그는 고백했다.   ‘그는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셨다. 나는 목마르지 않았다.’   혹독한 과정을 지났지만 주님이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지치지 않았다고 말한다. 죽을 것 같은 외로운 순간에, 두려움이 엄습하는 밤을 지나는 동안 두려움도 사실이지만, 목마름도 사실이지만, 그것보다 더한 사실은 주님이 더 큰 위로로 함께 하시는 것이었다. 그 목마르고 지친 순간에 그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이처럼 우리도 다 보장되었다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예수님 피 값 주고 사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주님이 어찌 모른다 하시겠는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우리의 불신을 책망하면서 도전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사시며 주리고, 아프고, 울기도 하셨다. 지독한 배신에 시달리기도 하셨다. 우리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겪으셨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주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아신다.   암에 걸렸던 사람끼리는 긴 얘기가 필요 없다. 동병상련이라고, 아파본 사람끼리는 안다. 서러운 일을 당해본 사람끼리는 서러움을 공유하는데 긴 말이 필요치 않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살아보신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공급자가 되셔서 ‘너 염려하지 마라. 근심하지 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해. 그러면 이 모든 것은 내가 너에게 공급해 주겠노라.’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은 최선이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모든 것에 감사한다. 주님의 허락하심에는 부족함이 없다.     [복음기도신문 http://gnpnew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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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20-03-04
  • ​[선교] 이슬람전도사 박동신 이맘을 보면서
    무슬림선교훈련원(원장 이만석)         최근에 매스컴에 한국인 무슬림 박동신씨의 기사가 종종 소개되는 것을 보게 되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펜을 들게 되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유튜브 방송, 아랍어 교실, 모스크 이맘 활동 등을 통해서 한국 내 이슬람 변증과 확산을 위해서 매우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었다.   매스컴에 소개된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는 안식교 신자였고 어머니는 장로교 신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으면서도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이슬람에 눈을 돌려 2009년 12월30일 개종하고 무슬림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년간 국내에 머물다가 해외로 나가 터키의 이슬람 사회를 2년간 체험했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3년을 머물면서 아랍어를 연수했고 요르단에서 3년을 머물면서 아랍어 8단계 과정을 수료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1년간 머물면서 알아즈하르 대학교 “알루와끄 알아즈하리(이슬람법학)를 수강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9년 한국에 와서 한국이슬람교평화회를 만들고 인천이슬람사원의 이맘이 되어 열심히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라는 것을 알리고 있다고 한다.   그는 처음 이슬람으로 개종 후 1년도 안 되어 꾸란 낭송대회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고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라는 것을 알리고 싶다”고 인터뷰한 기사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한국의 선교사들도 어렵다고 하는 아랍어를 잘 배워서 아랍어로 설교하는 동영상을 보면서 대단한 열심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슬람을 영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인터넷과 동영상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젊은이의 특징을 살려서 한국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포교하는 무슬림 중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확실히 한국의 무슬림들에게는 매우 고무적인 일로 생각되겠지만 이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있다.   사실 개인의 사생활 문제를 제 3자가 들먹이는 것은 인권침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는 이미 종교인, 방송인, 언론인으로서 그의 행동은 더 이상 사적인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공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쓰는 이유는 첫째는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속을 것 같은 염려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동분서주하는 그 똑똑한 청년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이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지만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공공연히 매스컴을 통해 홍보하면서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반대로 만일 어떤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하면서 방송을 통해서 기독교가 평화의 종교라고 강변하고 교회를 개척했다면 이슬람권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까를 상상해 보자.   당장에 그를 죽여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고 친척과 이웃들이 가문의 수치를 제거하기 위해서 부모의 손으로 그를 죽여야 한다는 압력이 끊임없이 들어올 것이다. 이는 무모한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며 이와 유사한 명예살인의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것만 봐도 과연 어떤 것이 정말 평화의 종교인지를 독자들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유능한 청년이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속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그가 스스로 밝힌 자신의 이력을 보면 아랍권에서 여러 해 살았지만 대학에서 이슬람의 법학을 공부했다고 하는 이집트에서는 1년 밖에 살지 않았다고 한다. 나머지는 아랍어를 배웠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알 아즈하르 대학은 이슬람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학 중의 하나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거기에 이슬람법학을 1년 만에 마치는 과정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를 못했다.   그가 수료했다고 하는 “루와끄 알 아즈하리”에 대해 이집트 아랍신문을 찾아보니 알 아즈하르 대학에서 운영하는 일종의 세미나 같은 과정으로 “외국인들에게 영어로 이슬람 소개와 미심쩍은 부분을 변증해주기 위해서 만들어졌으며, 매주 한 강의 씩 2개월 과정으로 2016년 말에 생긴 것”으로 게재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홍보용으로 미화된 이슬람만을 배웠을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을 가능케 한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알 아즈하르 대학에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배웠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집트인들을 통해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알 아즈하르 대학에서 이슬람 율법을 전공하려면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알아즈하르 부설학교를 다녀야 하는데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알 아즈하르 대학에서 이슬람율법을 전공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알 아즈하르 대학을 졸업하면 이집트 정부 소속의 이맘이 되어 특별한 복장을 입을 수 있는 자격을 준다고 한다. 만일 알 아즈하르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사람이 그 복장을 입고 행세한다면 벌금을 물리는 정도가 아니라 체포해서 투옥시킬 정도로 철저히 통제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그 복장을 입고 설교하는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온 것을 보고 이집트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경찰도 아닌데 경찰복장을 하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는 복장을 가지고 문제 삼는 사람은 없으니 괜찮다고 생각했거나, 이집트 경찰력이 미치지 않는 한국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누가 지적해도 처벌할 법이 없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했거나, 또는 알 아즈하르 대학이나 이집트 정부로부터 특별 허락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 점에 대해서 해명을 하지 않으니 고개가 갸우뚱할 뿐이다.   매스컴에 의하면 이슬람의 이맘이란 기독교의 목사나 천주교의 신부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목사나 신부는 최소한 교단 신학과정을 졸업해야 하지만 이맘은 그런 조건이 없다.   이맘이란 “앞에서 이슬람 식으로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모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꾸란을 잘 외우는 사람이면 충분하다. 굳이 학위나 졸업장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무슬림 남자라면 누구든지 앞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이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단 7구절로 된 꾸란 1장을 아랍어로 외우면서 이슬람식 기도하는 법 정도는 알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그가 이맘 노릇을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알 아즈하르 대학의 특정 복장을 했다는 것이 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가 정식으로 이슬람율법의 전과정을 이수한 것은 아니고 홍보용 세미나에 참석한 정도라고 본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의 홈페이지(islamkorea.com)에 보면 아랍어로 된 여러 가지 증서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대부분 아랍어 과정 등록증이나 학생증 이며 알아즈하르 대학에서 이슬람율법(샤리아)과정을 수료했다는 증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은 커녕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어도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모스크도 세울 수 있고 이맘 역할도 할 수 있으므로 전혀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 더구나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아랍어로 설교가 가능할 정도로 잘 준비되었으니 이점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홈페이지에 첫 장면에 보면 인천평화성원의 내부를 보여주는데 아랍어와 영어와 한국어의 3개 언어로 이슬람의 신앙고백을 적어 놓았다.   그 내용이 전부 서로 다른 것을 보고 그가 정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랍어의 내용은 “자비롭고 자애로운 알라의 이름으로, 나는 알라가 한 분이며 알라 외에 다른 신이 없으며 그분은 동반자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분의 종이며 메신저라는 것을 증언합니다.”라는 내용이다.   영어는 “알라 외에는 경배 받을만한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분의 메신저입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한국어로는 “하나님 외에는 경배 받을 존재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분의 마지막 사도입니다”라고 씌어있었다.   아랍어와 영어에 “알라”로 표기된 것을 한국어로는 “하나님”으로 번역했다.   알라(Allah)는 아라비아의 메카 지역에서 숭배를 받던 신의 고유명사다. 기독교의 하나님의 고유명사는 여호와이며 이 두 신은 전혀 다른 신이다.   말레이시아 대법원 판결에 의하면 이슬람 외의 종교에서 신을 “알라”라고 표현하는 것을 금하고 그렇게 번역된 성경을 압수한 사례를 보면 알라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newsis.com 2016.12.28.)   또한 “마지막 사도”라는 말은 아랍어나 영어에 없는 내용이다. 물론 이슬람 교리에 의하면 무함마드가 마지막 사도라고 주장하지만, “마지막 사도”라는 말이 중요해서 꼭 쓰고 싶었다면 영어와 아랍어에도 삽입했더라면 그런 의심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가 평화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 홈페이지에 보면 “한국이슬람교평화회 인천평화성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평화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사용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첫째는 정식으로 이슬람을 공부하고 학위도 취득해서 잘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속이는 소위 이슬람 학자들 혹은 성직자들이 있고 둘째는 꾸란도 모르고 이슬람 교리도 몰라서 귀에 들리는 대로 속고 있는 사람들이다.   박동신 씨는 두 번째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슬람 관련 학위를 취득한 일도 없고 인터뷰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알면서 속이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남에게 이슬람을 가르치는 사람은 최소한 취소(Mansukh)교리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   취소교리란 “ 꾸란의 이전 계시와 나중 계시가 상호 모순이 된다면, 나중 계시에 의해서 이전 계시는 자동으로 취소되고 더 나은 구절로 대체된다는 것이다.(꾸란2:106) 알 아즈하르 대학뿐 아니라 어떤 이슬람 학자라도 외국인들에게 이슬람을 소개하고 변증하는 정도의 세미나에서는 절대로 이슬람의 취소교리(Mansukh)를 가르치지는 않는다.   이슬람의 역사에 의하면 네 번째 칼리프였던 알리(Ali)는 “이슬람의 취소교리를 모르면서 꾸란을 가르치는 자는 자신도 망하고 다른 사람들도 망하게 하는 자다.”고 했다고 한다.(Ibn al Arabi al Maliki, Al-nasikh wal-mansukh fi al Quran al karim,Dar al Kotob al Ilmiyah, 2010, introduction)   박씨가 즐겨 인용하는 “종교는 강제로 하지 말지니라(꾸란2:256)”는 구절은 이미 취소되었고, “다신교도들은 어디서 만나든지 그 자리에서 죽이라(꾸란9:5)”는 구절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이슬람학자라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몰라서 속고 있는 것이다.   열심은 있으나 그 열심이 바른 지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일단 숨을 고르고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아랍지역에서 자란 청년 이상의 성인이라면 “Safk Dimaa al Kufar halal”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 뜻은 “비무슬림의 피를 흘리는 것은 할랄(허락된 것, 합법적인 것)이니라.”는 말이다.   모든 아랍권 무슬림이 알고는 있으나 실천을 안 할 뿐이다. 진정한 무슬림은 “생명과 재산을 바쳐 지하드(알라를 위한 전쟁)하는 자”(꾸란49:15)라고 꾸란은 말하고 있다.   평화를 말하는 무슬림은 꾸란에 의하면 진정한 무슬림이 아니다. 싸움은 무슬림의 의무다.(꾸란2;216) 세상 종교가 이슬람으로 통일될 때까지 (무슬림 아닌 사람이 한 사람도 안 남을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라는 것이 꾸란의 가르침이다.(꾸란8:39)   이슬람에는 “위험하다고 느낄 때는 거짓말을 허용하는 타끼야(Taqiya)라는 교리”가 있다.(꾸란2:225, 꾸란3:28)   위험하다고 느낀다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판단이기 때문에 이슬람 포교에 유익하다면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꾸란을 한글로 번역할 때도 양심의 가책 없이 아랍어 본문과 전혀 다르게 미화시켜 번역한 수많은 구절들을 필자는 알고 있다.   이슬람에 대한 책을 120권이나 쓴 옥스퍼드 대학교 학술회원인 “유수프 알 가라다위”는 “배교자를 죽이라는 율법이 없었다면 이슬람은 오래전에 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b3EcyIb_jfY)   한 때 이라크와 시리아의 1/3까지 점령했었던, 가장 잔인한 이슬람무장단체로 유명했던 IS의 창시자 아부바크르 알바그다디는 무식한 광신자가 아니라 박사(Ph.D)학위를 가진 이슬람 학자였다.   그는 아랍어가 모국어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숨기고 싶은 자료도 다 알고 있었다.   박씨가 유수프 알 가라다위나 아부바크르 알 바그다디보다 이슬람을 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 탕자처럼 방황하지 말고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면 그동안 배웠던 아랍어가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서 훌륭한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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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20-02-18
  • [선교] 누군가 잊혀진 영혼을 비추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한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바로 강화도로 들어왔습니다. 방에 앉아서 불을 끄고 건너편을 바라보았습니다. 빛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어두움이 건너편에 깔려 있었습니다. 설교를 하면서 한국교회가 너무 무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북한 지하 성도 이야기를 생전 처음 들었다는군요. 그럴 수가… 북한에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있음을 몰랐다네요. 그들을 위해 기도할 제목을 생각해 본 일도 없다네요.   자신들의 필요는 수십 년 동안 아뢰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북한 땅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 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다만 통일이 오면 무슨 사업을 할지는 생각해 봤답니다. 토목공사, 아파트 건축 등등이 통일 이후의 관심거리라는군요.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에는 관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은 하는데, 다른 곳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내 가족이라는 생각은 안 합니다. 흑인이나 백인 가운데도 하나님의 백성이 있고, 중국이나 일본에도 제 형제가 있습니다. 유대인 중에도 제 형제가 있습니다.   당연히 북한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 있습니다. 용서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이들이 그들 중에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의 형제입니다. 그들이 어려워하고 괴로움당하고 있는 걸 몰랐다고 말하시겠습니까?   지난 35년 동안 중국으로 북한으로 몽골과 러시아로 중동으로 다니며 주님께 구했습니다.‘함께 기도하고 마음을 같이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세요!’하고 울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아직도 북녘 땅에 하나님의 백성, 우리의 형제들이 죽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북녘 땅에 복음으로 인해 고통 당하는 그러나 그 일을 오히려 기뻐하는 주의 백성들이 그 땅에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손에 성경 한 권을 들려 주기 원하는 이들을 찾습니다. 어두운 저 땅에 잊혀진 하나님의 백성을 형제로 알고 기도할 분들을 찾습니다.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 주십시오. 저 백성들을 위해 여러분이 무엇을 할지를 여쭤 주십시오. 그리고 마음에 찔리는 대로 행하십시오.   통일 후에 무슨 일을 하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오늘 하나님께 내가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 주십시오. 우리 북한 사역자들의 손에 무엇이 들려져야 하는지를 물어주십시오.   그리고 행하십시오. 하나님이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모퉁이돌선교회는 여러분이 잊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열심히 땀 흘리며 뛰고 있습니다. 모퉁이돌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하나님께 여쭤보십시오.   하나님은 오늘도 자기 백성을 놓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일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감당하는 것이 기쁨이 될 것입니다.   저 건너편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잊혀진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혼이 밝게 비춰지도록 일하고 있습니다.     CORNERSTONE MINISTRIES INTERNATIONAL  모퉁이돌선교회 [2020 . 2 카타콤 소식]  무익한 종 이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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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20-02-13
  • [선교] 믿음의 사람, 다윗의 고백들
    김용의 선교사 (순회선교사. LOG미션 대표)       다윗은 시편 19편에서 놀라운 고백을 한다. 그는 하나님이 창조한 온 만물과 이 세계를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창조주 되신 주님을 발견하고 노래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온 천하 만물이 각자 세워진 자리에 있다. 온 행성과 항성들이 질서정연하게,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와 그 능력의 다스림 안에서 움직인다. 보이지 않는 완벽한 법칙 아래 움직여지고 있다는 건 하나님의 초월적인 지혜와 능력이다.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 19:2)   하나님의 정한 뜻이 자연 만물 안에서 한 치의 오차 없이 그 지어진 목적대로 정확하게 유지되고 운행되며 관리된다. 이 크고 영화로우신 창조주,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티끌 같은 우리 인생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신다.   게다가 머리털까지 세신다니 모르시는 게 어디 있겠는가. 내가 맞이할 모든 상황을 아시고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다 정해주시며 내 인생의 가이드인 진리의 율법을 주셨다. 내가 누구인지, 무슨 짓을 할지, 또 실수할지, 어떻게 돌이켜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망하지 않고 사는지 다 아신다.   하나님이 나를 속속들이 아신다는 게 얼마나 경이로운가. 만왕의 왕 되신 영원하신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나를 향한 모든 계획을 세워 놓으시고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이 들 때까지 일일이 지침을 주셨다면 가슴 터질만한 감격 아닌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시 19:7~9)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계명, 법도, 교훈, 도’라는 여러 표현으로 말하면서 내 일생 가는 길에 내 눈을 밝혀 주시고 내가 봐야 할 것을 바로 보게 해주시고 내가 걸어야 할 길을 바로 걷게 해주시고 내가 어긋난 길로 가지 않도록 매일 그 지침으로 해답을 주셨음에 감탄하며 고백한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   그는 순종으로 이 진리를 더욱 알게 되었다.   누가 내 인생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해답을 주겠는가. 영원히 안심하고 따라갈 수 있는 하나님의 지침, 깊은 사랑과 관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진리.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오직 그 여호와 하나님만 믿는 믿음이면 안심하고 갈 수 있다.   내 소원과 하나님의 소원이 일치하게 해주옵소서   “주님, 내 안을 살피셔서 묵상하고 생각하고 꿈꾸는 모든 것들이 당신의 말씀의 진리로 늘 정결하게 되어서 내 소원과 하나님의 소원이 일치하게 해주옵소서. 당신만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십니다.”   놀라운 주님을 알아갈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이면 충분하고 주님이면 다라는 사실이다.     [복음기도신문 http://gnpnew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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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30
  • [선교] 지금 이란 여행 가도 되나요?
    무슬림선교훈련원(원장 이만석)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다음 달에 이란에 여행 계획을 잡아 놨는데 지금 이렇게 어수선한데 가면 위험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신문과 방송을 보면 연일 미국의 거셈 솔레이머니 사살 사건 때문에 이란에서는 미군 주둔 캠프에 미사일을 쏘는 등 이란과 미국이 곧 전쟁이라도 치를 듯이 으르렁대는 것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뉴스들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자의 대답은 간단했다. 미국과 이란 모두 전쟁을 원치 않기 때문에 안전할 것이니 걱정 말고 다녀오시라고 했다. 그러다가 만에 하나 큰 사건이라도 발생하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렇게 무책임한 대답을 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대답을 한 것은 아니다. 필자는 이란에서 20년을 살아 본 사람이다.   이란의 치안은 중동에서 최고 안전한 나라라고 자부하고 있으며 필자도 이를 인정한다. 필자는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이 치열했던 1986년부터 근 20년간 이란에서 살았다.   1980년 9월에 시작된 이 전쟁은 1988년 8월까지 계속되었다. 미국이 이란의 비행기 부품제공을 금했기 때문에 이란의 전투기들은 한 대도 뜨지 못하는 동안 이라크의 공군기가 이란의 수도 테헤란 상공까지 날아와 민가에 미사일을 쏘고 돌아갈 정도로 치열했었다. 그 때까지 이란의 구호는 “장그 장그 타 피루지(승리할 때까지 전쟁, 전쟁이다)” “터 억하린 까트레예 훈(마지막 피한방울까지)”라고 외쳐댔으나 수도 테헤란에 155발의 미사일을 맞으며 호메이니 옹은 “이라크에서 먼저 유엔에 평화안을 제출했으니 우리가 이겼다”고 승리를 자축하며 전쟁을 끝냈다.   만일 한국 같았으면 수도 서울에 미사일 한 발만 떨어져도 보따리 싸서 피난한다고 공항으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란 사람들은 언제 또 미사일이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상태에서도 도망갈 생각은 커녕 미사일에 파괴된 집과 깊이 파인 웅덩이로 몰려들어 구경하느라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때는 이란과 이라크라는 두 이슬람국가끼리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민간인들에게도 폭격을 가했지만 지금의 상황은 상대가 미국인 것이다. 만약에 진짜 전면전이 벌어지더라도 미국은 결코 민간인들에게 폭격을 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안전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근래에 지금처럼 이란이라는 나라에 한국인들의 관심이 집중되었을 때도 없었다. 이런 기회에 중동의 패권을 추구하는 이란을 좀 더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란은 성경에 등장하는 고레스, 다리오, 아하스에로,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압버스, 거저르, 팔레비 왕까지 2,500년간 왕이 다스리던 나라다.   마지막 왕인 팔레비 왕은 친미 성향으로 이란 경제를 중동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당시 이란 사람들은 유럽에 버금가는 자유와 인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 때 왕을 대적하다가 외국으로 추방당한 호메이니는 “만일 우리가 정권을 잡으면 땅에서 펑펑 나오는 기름 팔아서 국가 운영하고 남는 돈은 각 가정에 배달해 주겠다. 돈이 남는데 왜 국민들에게 세금을 거두는가?”는 등의 말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국은 1979년 이슬람 혁명에 성공하여 팔레비를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국호에 이슬람을 삽입하고(Islamic Republic of Iran) 이슬람율법으로 다스리는 나라를 만들었다.   혁명 후 돈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해외로 피신하고 이라크와 전쟁 통에 전사자들에게 “순교자”칭호를 주며 유가족들에게 트럭이나 트레일러를 한 대 씩 주는 등 선심을 쓰며 국민들의 마음을 달랬으나 재정이 고갈되자 선심도 사라지고 세금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때만 해도 전쟁 중이라서 어쩔 수 없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착한 국민들은 이해를 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도, 호메이니가 죽어도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통치 경험이 없는 이슬람 성직자들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모든 기관의 최고 결정권자는 이슬람 성직자들로 세웠다.   그러니 팔레비 때 세계를 누비며 활동하던 진짜 실력 좋고 경험 많은 사람들은 재산 정리하여 대우 좋고 안전한 해외로 빠져 나가고 경제는 곤두박질하기 시작했다. 만일 그 때 팔레비 왕 밑에서 충성했던 경험 많은 고급인력들을 기용해서 “당신들이 계속 나라와 경제를 운영하고 우리는 백성들의 영적인 성숙을 교육하는 신앙부분만 책임지겠다”고 했다면 이란은 지금도 부강한 나라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 때 재산이 많거나 벼슬했던 사람들을 축출하고, 왕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죄인 취급하며 처벌하면서 이슬람 율법을 강요하고 여성들은 히잡을 의무화하고 여성 법관들은 모두 해고하는가 하면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는 등 이런 모든 일들을 이슬람의 이름과 신앙과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하면서 경제는 곤두박질하니 어떤 국민이 이런 정권을 지지하겠는가?   정부가 이슬람 율법을 강요할수록 호주머니가 비어있는 국민들은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입법부와 사법부 및 매스컴과 군부와 치안을 장악한 정권은 국민들의 저항을 용납하지 않았다.   지금도 삼권분립이 존재하고 국민들의 투표를 통해서 지도자도 선출하기도 하고 국회에서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하고 재판을 통해서 사형을 언도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도 이슬람율법의 최고 결정권자인 종교지도자(Supreme Leader) 허메네이(Khamenei)의 추인을 받아야 효력이 발생한다.   이란의 대통령선거는 매우 특별하다. 건강한 무슬림 남성이면 누구든지 출마가 가능하기에 수천 명의 입후보자가 등록한다. 그리고는 후보가 너무 많아서 국민들이 선택하기 좋도록 일차 자격심사회의를 거쳐서 4명 정도로 후보를 압축시킨다. 이 때 이미 이슬람성직자들의 기준에 안 맞는 사람들은 모두 걸러지고 국민들이 누구를 선택하든 정권과 코드가 맞는 사람들만 남게 된다.   국회의원 출마도 역시 마찬가지다. 일차 자격심사위원회에서 정권과 코드가 안 맞는 사람들에게는 출마 자격이 박탈된다. 심지어는 직전 회기 국회의원들도 출마 자격이 박탈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럼에도 경제만 좋다면 이란 국민들은 누가 다스리든지 상관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다.   이란이 핵무기를 만든다고 국제사회로부터 경제제재를 받게 되자 세금이 순식간에 3-4배가 뛰는가 하면 휘발유 값이 몇 배가 뛰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팔레비 축출 전 1979년 당시 미화 1$는 70리얄이었다. 화폐 개혁 없이 계속 평가절하 되어서 2011년 말 1$당 9,800리얄 하던 것이 2012년 초 17,000리얄로 뛰더니 2018년 초 4만 리얄에서 2019년 초 11만 리얄이 되었고 2020년 1월 현재 13만 2천리얄이다.   2019년 11월 중순에도 이란에서는 경제가 어려워지자 휘발유 값을 올렸다. 1 리터 당 1만 리얄 하던 것을 1만5천 리얄로 올렸다. 그러면서 자동차 한 대당 한 달에 60 리터로 소비량을 제한하고 그 이상의 연료가 필요하면 리터 당 3만 리얄에 사서 쓰라는 것이었다. 이란은 땅이 넓어서 도시간 거리가 수백 Km 정도 되니 60리터로는 한 달간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결국은 유가가 300%로 인상된 것이다.   이란의 일반 노동자들의 일당은 2020년 3월21일까지 유효한 정부 고시 최저임금에 의하면 50만5627리얄(현재 환율로 미화 약 3.8$)이다.   국민들은 정권에 대한 불만이 표출될 경우 지나치게 가혹한 처벌이 무서워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유가 인상으로 국민적 분노가 폭발하여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나고 최고 지도자의 퇴진까지 요구하는 사태로 확산되자 강력하게 진압을 하는 과정에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수천 명을 체포했다고 한다.   이란 정부도 국민들의 경제적 불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불만을 경제적으로 해소시켜줄 만한 능력은 없고 그것을 미국에 대한 분노 쪽으로 전환시킬 작전을 짜고 있었다.   그래서 로이터 통신에 의하면 거셈 솔레이머니 혁명수비대 사령관이 이라크에 있는 민병대를 시켜서 미군들을 공격함으로 미군의 반격을 유발시키려 했다고 한다.   솔레이머니는 지난해 10월 이라크 주재 미국대사관이 내려다보이는 바그다드의 티그리스 건너편 모처에서 이라크 내 시아파 민병대 지도자들을 만나 “이란이 신형 무기를 제공할 테니 미군에 대한 공격 수위를 높여라”고 주문했으며, 이들이 만나기 직전에는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 카타입 헤즈볼라(KH)에 레이더를 피하는 기술을 갖춘 최신 드론으로 미군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솔레이머니는 또 미국인 거주지를 타격할 민병대를 새로 구성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2020.1.7. 동아일보)   그래서 이라크 시야파 민병대는 2019년12월27일 키르쿠크 미군기지에 로켓포 30발을 발사해 이라크계 미국인 통역사 노리스 하미드(33)를 살해하고 수십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에 미군은 공격 주체로 보이는 카타이브 헤즈볼라와 연관된 목표물 5곳을 공습해 25명을 사살했다.   그러자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 지지자들이 바그다드 미국 대사관 주변에 모여들어 폭력시위를 했다. 이들은 50여개의 텐트를 치며 급식소와 의료시설까지 완비하고 장기 농성을 꾀하며 담장과 입구 시설물에 불을 지르며 본관 진입을 꾀했다.(2020.1.2. 뉴데일리) 그리고 1월3일 배후를 알 수 없는 바그다드 국제공항에 로켓포 공격으로 8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1월3일 미국은 드론 공격으로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 거셈 솔레이머니를 사살한 것이다.   이 때 미국은 “우리는 이란과의 전쟁을 막기 위해 거셈 솔레이머니를 사살한 것이다. 만일 그를 살려두었다면 많은 미국인들이 살해당했을 것이며 그러면 이란과 미국의 전쟁은 불가피했을 것이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이미 2019년 4월 8일 중동에서 함마스와 헤즈볼라를 지원하며 활동하고 있는 이란의 혁명수비대를 테러단체로 지정했으며 이번에 그 사령관을 제거한 것이었다.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공격을 가한 것에 대한 분노로 이라크 의회는 미군 철수를 의결했으나 미국은 “적당한 때에 철수 하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는 입장이다.   이란은 이에 거셈 솔레이머니를 순교자로 지칭하며 국가적인 장례행사를 통해서 반미감정을 고조시키며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데 일단은 성공했다고 보인다.   숨진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 거셈 솔레이머니의 딸은 장례식에 참석한 하산 로허니 대통령에게 “누가 복수해 줄거냐”고 묻자 대통령은 “우리 모두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1월 7일 장례식이 끝나자 바로 이라크의 미군기지를 향해 수십 발의 지대지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란은 이 공격이 매우 후련한 복수였으며 이로 인해 약 80명의 미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국영방송을 통해서 발표했다.   그러면서 만일 미국이 또 다시 이란에 보복한다면 더 큰 공격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일단 복수의 모양새를 취해서 국민들의 분노도 달래고 체면도 살렸지만 전쟁으로 확산되는 것을 원치는 않는다는 입장표명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52개의 공격목표를 정했다고 발표하면서 대규모 전면전이 곧 터질 것 같은 위기감이 조성되었지만, 이란은 공격을 감행하기 1시간 전 이라크에 공격 사실을 통보했으며 미군이 대피할 시간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실제로 미군의 인명피해는 없었다는 보고를 들은 트럼프 대통령은 군사공격 대신에 경제 보복을 취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서 미국과 이란의 전면전 가능성은 희박해졌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솔레이머니와 함께 사망한 아부 마흐디 알무한디스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PMF) 부사령관으로 인해 이라크 민병대가 미군에 보복성 공격을 가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불씨로 남아있긴 하다. 미국에서는 이들도 이란의 지시를 받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인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복수를 해야 하겠지만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언제나 이란이 경제가 좋아져서 먹고 싶은 첼로케밥을 돈 걱정 없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까? 언제나 이란 사람들이 자신들의 양심에 따라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질 수 있을까?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슴 속에 있는 말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 날이 기다려진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는데 지금 이란은 깊은 밤으로 보인다.   멀지 않은 장래에 이란 사람들이 도시마다 교회를 세워 예수 그리스도를 목이 터져라 찬양해도 아무도 체포하러 오지 않는 날이 오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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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20-01-20
  • [선교] 바로 오늘 이곳에서,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되길
        종일 차에 실려서 도착한 숙소의 이름이 ‘천천히’였습니다. 우리말로 ‘느긋이!’라고 옮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마치 저를 보고 “얘야! 이젠 좀 천천히 해라!”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서였을까요? 전기도 천천히 켜지고 또 천천히 꺼졌습니다. 손이 닿기가 무섭게 꺼지고 켜지는 데 익숙한 저는 좀 당황했습니다. 설교 중에 이런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나네요. 부친이 이민 초기에 타신 차가 10분이나 걸려서 발동이 걸렸다고요. 그 덕분에 영화 회사에 가게 됐고 이민 가는 특별한 기회를 얻었다고요. 그 차는 저의 첫 미국 이민 차였고 그 차로 운전 면허를 받았습니다.   제가 마음이 좀 급한 편이지만 행동은 굉장히 느린 편입니다. 그런 제가 35년을 달려 온 과정이 느리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되었습니다. 그리 바쁘게 다닌 것 같지 않은데 기록을 찾아보니 2019년에 234번 강단에서 설교를 했네요. 적지 않은 횟수이지만 문제는 바른 소리를 냈느냐는 것입니다. 사역을 시작할 때 파수꾼이 나팔을 제대로 부는지에 관한 말씀인 에스겔 33장을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오늘 그 말씀을 다시 읽게 하십니다. 설교를 몇 번 했느냐보다 설교를 바로 했느냐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하십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역합니다. 한국 땅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국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 저 또한 예외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이 험악한 한국 교회와 북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북한의 상황이나 알렸고 개인적인 간증에 치중했음을 회개합니다. 나팔수가 나팔을 제대로 불지 못했습니다. 파수꾼의 자리를 지키지 못한 죄를 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의 소리를 낸 것은 순종이었고 결과적으로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의 순종이 여러분과 나의 죄를 대속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뾰족한 교회의 십자가가 동네마다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 위해 피 흘려야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 종들의 흔적이 살아나기를 기도합니다. 나팔수로서 파수꾼으로서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제 자신이 죽음에 이르더라도 마땅히 불어야 할 나팔 소리를 내게 되기를 원합니다. 파수꾼으로서 광야의 소리를 외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바로 오늘. 바로 이곳에서 이 시간에 순종하기를 소망합니다.       CORNERSTONE MINISTRIES INTERNATIONAL  모퉁이돌선교회 [2020 . 1 카타콤 소식]  무익한 종 이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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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8
  • [선교] 복음의 삶은 믿음으로만 살아가는 삶이다
    김용의 선교사(순회선교사. LOG미션 대표)       밤이 깊고 어둠이 짙다고 이곳저곳 방황해야 할까. 아니다. 새벽은 해 뜨는 동편에서만 열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호세아 선지자는 비명처럼 외친다.   생명을 얻는 길은 해가 동편에서 떠오르듯 오직 한 길 뿐이다.   역사의 암울한 시기마다 시대를 일깨우는 선지자들의 외침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졌다.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를 만날 때에 그를 부르라.’   소망이 없어 보이는 이때, 우리의 눈을 들어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구원의 유일한 소망이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세상의 운명은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께 달려있다. 그리고 그 보좌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복음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기도하는 자들이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고 누에는 뽕잎을 먹고 산다. 그렇듯 육의 사람은 세상의 떡과 포도주로 살지만 영에 속한 하늘 백성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이 혼돈하고 소망 없는 역사에 들려줄 마지막 대답.   ‘다시 복음 앞에!’   야곱에게 돌아갈 벧엘이 있고 탕자에게 돌아갈 아버지의 집이 있듯이 방황하는 인류에게 주어진 유일한 해답은 십자가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완전한 복음이 요구하는 것은 오직 믿음이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의 고백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지금으로 표현하자면 ‘완전한 복음을 주신 하나님 앞에 오직 믿음이면 충분하다.’는 말이다. 유일무이하고 전지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신 영원하신 하나님. 만물의 근원이자 역사의 통치자시며 의의 왕, 생명의 주관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다윗은 빈들에서 양을 치던 열여섯 살 소년 목동에 불과했다.   어느 날 갑자기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오히려 사울 왕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어떤 보장도 받지 못한 채 10년을 넘게 쫓겨 다녔다. 그러는 동안 부모도 그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친구 하나도 그의 곁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가 겪는 일생의 어려움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다윗은 매일 죽음을 목전에 두고, 격렬한 세상 현장 한 가운데서,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다. 모든 환난 중에 아무것도 믿을 게 없었다. 그때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 일생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가 되셨기에 내게는 결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오직 믿음이면 됩니다.”   다윗은 ‘오직 믿음’의 삶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표현했다.   이것은 다윗의 지혜가 아니요,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복음의 비밀이다.   믿음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복음의 삶이다. 믿음으로 충분히 살 수 있고 믿음이면 충분하다.     내 손 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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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20-01-08
  • [선교]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야 하고, 되찾아야 할 부흥”
    김용의 선교사 (순회선교사. LOG미션 대표)       마지막 날에는 연합이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세 나라, 이스라엘과 애굽과 앗수르가 연합하여 세계 중에 복이 될 것이다(사 19:23~25).   이 세 나라는 세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이 세 나라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었다.   둘째, 이 나라들은 원래 한 혈통에서 나왔다.   셋째, 이들은 구원의 대상으로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연합될 수 있을까?   인종과 혈통에 상관없이, 정치적 배경을 무론하고,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복음 안에서는 모두 하나가 된다.   복음 안에 시온의 대로가 열렸다.   시온의 대로에서 하나님과 죄인이 ‘임마누엘’의 연합을 이루고, 죄인과 죄인이 하나 되어 가정의 연합을 이루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 공동체가 된다(엡 2:13~18).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서로 연합하여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의 본성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지독하게 ‘내’가 중심되어 살아오던 사람들이 어느 날 믿음으로 순종하여 서로 사랑하고 섬기면 스가랴의 환상이 이루어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슥 8:23)   이 모습이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야 하고, 되찾아야 할 부흥이다.   지금의 교회는 더 이상의 신학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역사상 그 어느 시대보다 더 많은 신학적 연구를 해 놓았다. 화려한 예배당과 조직, 교단, 무엇 하나 모자란 것이 없다.   그러나 교회는 맥을 잃고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실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능력은 한 몸 된 공동운명체였다.   구경꾼이 따로 없었다. 성직자 따로 있고, 콘서트 구경하듯이 예배를 구경했던 교인 따로 있지 않았다.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이었다. 핍박도 같이 받았다. 자기들의 소유를 ‘자발적으로’ 내놓아 누구 하나 부족하거나 가난하지 않았다. 이런 교회가 세상을 향한 강력한 증거가 된다. 교회는 이 영광과 생명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인 성도는 절대 홀로 완전하지 않다.   따라서 자기 혼자 하나님 노릇하려는 ‘자아’는 교회의 연합을 깨뜨리는 가장 무서운 저주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연합을 가로막는 지독한 자아를 넘어서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스가랴 선지자의 환상이 실현되는 것은 요원(遙遠)하다.   주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복음을 다 이루어 놓으셨다.   그리고 마지막 추수(秋收)의 때인 지금은 우리의 순종만이 남아 있다.    [복음기도신문 http://gnpnew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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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7
  • [선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마지막 비전
    김용의 선교사 (순회선교사. LOG미션 대표)       역사의 마지막에 주님이 이루실 놀라운 환상이 있다.   자기를 사랑하여 자긍하고 교만하며 악독하여 전쟁과 무서운 살인, 탐욕으로 뒤엉킨 세상의 마지막 ‘고통하는 때’(딤후 3:1~5)에 죄인들로서는 도저히 꿈 꿀 수 없는 마지막 부흥의 역사가 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다시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주민이 올 것이라 이 성읍 주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하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슥 8:20~23)   인간의 본성을 거슬러 일찍이 역사에 없었던 일이 일어난다.   이 백성, 저 백성이 몰려와 죽이거나 빼앗지 아니하고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고 말한다니!   역사 속에서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말이 달라서 서로 뜻이 안 통하는 이방 사람 열 명이 다 한 영에 사로잡혀 유다 사람 한 사람의 옷자락을 잡으며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우리가 보고 들었으니 너희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해 달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역사 마지막 순간에 펼쳐질 아름다운 장면, ‘연합’   마지막 날에 벌어질 위대하고 놀라운 ‘연합’은 정치로도 안 되고, 지방색으로도 안 되고, 교육으로도 안 되고, 다른 무엇으로도 불가능하다.   서로 원수처럼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빼앗고,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저주 받은 이 땅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허물어 버리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될 수 있도록 유일하게 허락하신 교회마저 서로 반목(反目)하고 있다.   신학 지식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돈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건물이 모자란 것도 아닌데 500년 전 종교개혁을 통해 어렵게 진리를 되찾았는가 싶더니 불과 10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종교개혁자들이 스스로 간신히 지펴 놓은 개혁의 불길을 스스로 꺼버렸던 역사를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다.   나조차 나를 사랑하기 힘든 우리로서는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연합’의 꿈은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작금의 교회의 상황을 볼 때 더욱 암담하기도 하지만 주님이 이루실 궁극적 비전이 있다.   역사의 마지막에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펼쳐질 아름다운 장면이 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비전이 바로 이것이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은 절대 섞일 수 없다. 공존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마지막 날 이들 모두가 거룩한 옷을 입고 손에 평화를 상징하는 종려가지를 들고 의와 화평과 희락과 성령의 나라에서 한 형제와 자매로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구원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http://gnpnews.org/]
    • 오피니언
    • 선교
    2019-12-16
  • [선교] 이슬람의 윤리관
    무슬림선교훈련원(원장 이만석)       이슬람은 지금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어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슬림들 외에는 이슬람의 급성장을 반갑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듯하다.   왜냐하면 어떤 나라든지 이슬람 인구가 늘어나면 사회가 불안해지고 범죄가 늘어나고 테러가 발생하는 등 달갑지 않은 현상들이 눈에 띄게 증가하기 때문이다.    9/11 테러만 생각해 봐도 어떻게 인간으로서 승객들이 가득 타고 있는 출근용 비행기를 납치해서 빌딩을 들이받아 수많은 사람들을 모두 죽일 수 있을까?   이것이 전쟁 상황이라거나 또는 마피아 같은 갱단들의 앙갚음이라면 안타깝기는 하지만 혹시 이해하며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고 일 년에 한 달씩 금식하는 철저히 헌신된 종교인들이 평화로운 대도시에서 저지른 사건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상식의 틀이 깨져버리는 느낌이다.   이런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의 윤리관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슬람의 윤리관은 인류 보편적인 기준과는 전혀 다르다.   이슬람 공동체를 움마(Ummah)라고 한다.   이슬람에서는 움마에 유익이 되는 행위는 선행이고 움마에 손해가 되는 행위는 악행으로 간주하는데, 이것이 선악을 분별하는 기준이다.   일반적으로 살인 간음 폭력 도둑질 거짓말 등의 행위는 악행이라고 보지만 이슬람의 윤리관은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살인이나 폭력 등 강력한 범죄행위도 움마에 유익이 된다면 선행으로 장려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종교에는 최소한의 인류 보편적인 윤리가 있어야 한다는 대전제를 인정한다면, 이슬람은 종교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슬람에는 도덕성이 없다는 말인가? 물론 이슬람에도 도둑질하면 손을 자르라(꾸란5:38)는 처벌과 간음한 여인은 가슴까지 땅에 묻고 돌로 쳐 죽여라(하디스)는 처형 등 윤리를 해친 자들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강력한 처벌 규정이 있기는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적용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슬람권에서는 금요일마다 대규모 기도회가 열리는데 가끔은 최고 지도자(Supreme Leader)가 설교를 한다.   이란의 최고 지도자는 대통령보다 높은 직위다.   필자가 이란에 있을 때 이슬람 최고 지도자가 설교를 하는 날은 일삼아서 듣곤 했다.   어느 날 금요예배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 TV를 켰는데 그가 설교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가 막 집을 나서려는데 전화벨이 울리기에 수화기를 들었더니 어떤 여인이 울먹이면서 질문을 했다고 한다. “폭력이 좋은 일인가요? 나쁜 일인가요?”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보라고 했더니 거두절미하고 정답만 알려 달라고 다그치더란다. 최소한 누가 누구를 때리는 폭력인지 말해보라고 했는데도 상황을 배제하고 제발 폭력 자체의 선악을 대답해 달라며 통곡을 하더란다. 아마 남편에게 억울하게 폭행을 당하고 속이 상해서 질문을 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최고 지도자의 대답이 무엇이었을까? 그는 “폭력은 좋은 폭력도 있고 나쁜 폭력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슬람을 대항하는 폭력은 악한 폭력이지만 이슬람을 돕기 위한 폭력은 좋은 폭력이다”는 것이 그날 그의 설교의 핵심이었다.     폭력 뿐 아니라 살인도 마찬가지 기준이 적용된다.   꾸란에 보면 살인하지 말라고 명하는 구절이 있기는 하지만 성경과는 다르게 표현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살인하지 말라(출20:13)”라는 명령에 다른 조건을 붙이지 않음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 자체가 나쁜 것임을 나타내고 있지만 꾸란에는 “정당한 이유 없이는 사람을 살해하지 말라(꾸란17:33)”고 명하고 있다.   이슬람 학자들은 이것을 형법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상은 정당한 이유만 있으면 법정에 가지 않고 살해해도 된다는 것이 이슬람의 가르침이다.   이란에 있을 때 신문에서 “배교자는 법정에 끌고 갈 필요도 없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쳐 죽여라”는 칼럼을 읽고 놀랐던 일이 있다.   그러나 이란 사람들은 그 칼럼을 읽고도 아무도 놀라는 사람이 없었다. 모든 무슬림들이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슬람의 율법이었기 때문이다.        꾸란을 보면 “4개월의 유예 기간이 지났는데도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교도들을 발견하면 어디서든지 살해하라(꾸란9:5)”고 명하고 있다. 이슬람 학자들은 이 구절이 전쟁터에서 적을 만나면 죽이라는 뜻이라고 미화시켜 설명한다.   하지만, 2절에서 4개월 동안의 여행을 허락하고 나서 4개월이 지나도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이라고 했으므로, 여행객들을 죽이라는 말이지 전쟁터에서 무장한 적군을 죽이라는 말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어디서 만나든지 죽이라는 것은 재판 절차가 필요 없다는 말이다.          이슬람의 윤리는 전쟁 윤리다.       이슬람에는 세상을 평화의 집(Dar al salam)과 전쟁의 집(Dar al harb)의 두 부분으로 나누는 특별한 세계관이 있다.   그들의 세계관에 의하면 평화의 집은 무슬림들만이 살 수 있는 곳이고 이슬람 이외의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전쟁의 집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이교도들과는 항상 전쟁상태라는 것이 이슬람의 세계관이다. 이교도들과의 전쟁을 지하드(Jihad)라고 하는데 이는 무슬림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다. 아래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록)를 보자.           아부 후라이라가 전하기를:  어떤 사람이 알라의 사도(무함마드)를 찾아와서 “지하드와 (상급이) 동등한 행위를 알려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나는 그런 행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그대는 무자헤딘(지하드 전사)이 전쟁터에서 싸우는 동안 모스크에 가서 금식하면서 쉬지 않고 이슬람식 기도를 드리며 전쟁이 끝나서 돌아올 때까지 금식과 이슬람식 기도를 멈추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물으셨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부 후라이라는 “무자헤딘(지하드 전사)에게는 그의 말이 긴 줄에 묶인 채 풀을 뜯어 먹는 동안에 밟는 발자국들에도 보상이 주어진다”고 덧붙였다.(Sahih Bukhari Hadith Volume 4, Book 52, Number 44)      지구상의 많은 종교들은 기도와 금식을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슬람만은 기도와 금식보다도 이교도들과의 전쟁에 참여하는 지하드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오랫동안 다정하게 지내던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이슬람을 믿지 않는다고 죽이러 가자는 지하드 전쟁에 보통 사람이라면 참여를 꺼리는 것은 당연하다.   꾸란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위선자로 정죄하면서 큰 심판으로 위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꾸란9:38-39) 지하드에 참여를 꺼리는 사람은 배신자나 위선자로서 지옥의 자식들이라고 한다.(꾸란9:73) 따라서 진정한 무슬림들은 사사로운 정에 얽매어 알라의 명령인 지하드를 집행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슬람에서 지하드가 최고의 가치라면 이슬람의 윤리는 전쟁윤리라고 할 수 있다.   전쟁터에서는 일반적 윤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아무리 선한 사람도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살해당할 수 있기 때문에 살인하지 말라는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적을 속이지 않으면 이길 수 없기 때문에 거짓말하지 말라는 법도 적용되지 않는다.        무함마드는 지하드 전쟁에서 승리하면 남자들은 다 죽이고 점령지 여인들을 병사들에게 전리품으로 나눠주었기 때문에 무슬림 병사들은 불륜이라는 개념 없이 그 여인들과 성욕을 채우곤 했다.   꾸란에는 이런 여인들을 “오른손이 소유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들과의 동침을 허락하고 있다.(꾸란4:24)   유럽에서 무슬림들이 간음죄로 처벌받는 경우가 많은 것은 유럽 여인들을 점령지 여인들로 착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최근에 튀니지의 한 이슬람 성직자가 지하드 전사들을 위하여 여인들이 성(性)을 바치는 것은 여인들이 할 수 있는 결혼지하드(지하드 알 니카)라고 파트와(Fatwa:이슬람 칙령)를 선언하자 사우디의 여러 이슬람 학자들이 그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튀니지 내무부 장관의 말에 의하면 약 6000명의 여인들이 시리아에서 고생하는 이슬람 반군들을 위해 자신들의 몸을 바치려고 나섰다는 것이다. 그 여인들은 전선에 들어가서 20~30명, 심지어 100명 정도의 지하드 용사들과 관계를 맺고 임신하여 돌아오는 일들이 많아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지하드를 위해서는 불륜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슬람의 전쟁윤리이다.        물론 이를 불륜으로 비난받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결혼 계약서를 쓰고 부부로서 성관계를 한다.   단지 그 결혼 계약이 2~3시간 유효한 시한부 계약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성윤리가 엄격하기로 소문난 무슬림들이 이렇게 편법을 이용하여 불륜을 허용하는 이유는 지하드라는 최고 가치 때문에 전쟁윤리를 적용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류가 다른 종교나 다른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을 존중하고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미덕으로 장려하고 있지만 이슬람만은 비무슬림들과 친구로 사귀지 말라고 꾸란에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꾸란3:28, 꾸란4:138-145) 왜냐하면 전쟁시에 적과 친구가 되어서 내통하면 전쟁에 패하기 때문이다.        이슬람에서는 타종교로 개종하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슬람을 떠나면 죽이라는 것이 이슬람의 율법이다.   이는 전시에 탈영하면 사형에 처하라는 전쟁윤리를 적용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다.   따라서 개종한 무슬림들은 자신의 개종을 공개적으로 알리기를 두려워한다.       우리가 이렇게 입에 담기도 부끄럽고 비상식적인 내용을 말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슬람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이슬람의 윤리관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는 무슬림들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올바른 대책을 세울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슬림 형제자매들을 좀 더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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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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