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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12.02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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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일 교수(현대종교 이사장 겸 편집장).jpg

탁지일교수(현대종교 이사장 겸 편집장)

 

 

 

이단연구를 하면서 늘 궁금한 점이 하나있다.
 
다소 불만이 있더라도 안락하고 안전한 가정과 교회에 머무는 편이 훨씬 이득일 것 같은데, 왜 굳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고) 불편하고 불안전한 이단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차라리 (확실한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도 졸업하고, (부자가 되기는 어려워도) 직장도 계속 다니고, (그다지 만족스럽거나 행복하지는 않아도) 가정에 남아있으면, 평범하고 무난한 삶을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학업과 직업과 가정을 냉정하게 팽개치고 스스로 이단에 찾고, 그 안에서 고집스럽게 머무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어떤 명분이 이런 불합리한 선택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일까?
 
물론 이단들이 가지고 있는 ‘미혹의 기술’인 마인드컨트롤(mind control)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사이비종교문제 전문가인 스티븐 하산(Steven Hassan)은, 사이비종교에 빠지는 이유가 마인드컨트롤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마인드컨트롤이란, 한 사람의 정체성에 혼란을 주는 동시에, 새로운 정체성으로 바꿔 놓는 시스템이라고 정의하고, 이를 “BITE Model”이라는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Steven Hassan, Combatting Cult Mind Control, 1988).
 
첫째는, 생활통제(B, Behavior Control)이다.
 
사이비종교는 신도들에게 헌신을 요구하는 한편, 소소한 일상의 자유생활까지도 치밀하게 통제한다. 정기적인 교리교육을 빙자해 시간을 통제하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포교활동을 통해 정신을 통제하고, 끊임없는 지시와 명령을 통해 선택의 자유마저도 통제한다.
 
둘째는, 정보통제(I, Information Control)이다.
 
인간은 정보를 통해 삶의 균형과 방향을 잡는다. 반면 정보의 통제는 객관적인 사고와 판단, 그리고 비판의식을 마비시킨다. 언론매체와 인터넷을 통한 정보습득을 악(惡)한 것으로 규정하고, 오직 이단 교리와 지도부의 지시에만 복종하도록 만든다. 가족과 지인들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정보마저 통제된 상황이라면, 결국 이단에 모든 것을 맡기는 무기력한 존재가 되고 만다.
 
셋째는, 사고통제(T, Thought Control)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을 제한하고, 교리교육을 통해 사고의 통제를 강화한다. 교회의 성경공부를 통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만, 이단들의 성경공부를 통해서는 신격화된 이단지도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의 통제는 결국 비상식적인 신격화를 수용하게 만든다. 이단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는 눈을 바꿔버린다. 결국 성경의 어떤 내용을 읽어도, 이단의 논리에 빠져, 이단의 눈으로 자신과 주변을 바라보고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넷째는, 감정통제(Emotional Control)이다.
 
신도들은 죄의식과 위기감을 반복적으로 교육받으며, 교주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배우게 된다. 성공하는 교주는, 자신이 얼마나 신격화된 존재인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신도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가르친다. 신도가 점점 죄인이 되어갈수록, 그 죄를 지적하는 이단지도자는 점점 영적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종말론적 위기감의 조성은, 개인의 감정을 요동치게 만들고, 위기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가정과 교회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게 만든다.
 
 
마인드컨트롤을 통해 사이비종교에 빠지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마인드컨트롤로부터 회복되는 것이라고 스티븐 하산은 강조한다.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 그리고 이를 통해 가정과 교회를 회복하는 일이 이단대처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사이비종교문제에 있어서 정죄와 분리보다, 치유와 회복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이단들이 가지고 있는 ‘미혹의 기술’과 함께, 우리 가정과 교회 안에 원인을 제공하는 요인들이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감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다.
 
 
먼저, 교회지도자들의 비상식적이고 부정직한 모습이, 상식적이고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에게로 내모는 것은 아닐까?
 
겉으로는 거룩한 목소리와 점잖은 모습으로 대중 앞에 스스로를 노출하지만, 속으로는 명예와 이권에 연연하며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을 ‘연합’으로 미화하고 합리화하면서, 세속정치인 못지않은 눈속임과 술수에 능수능란한 교회정치세력들의 모습이 싫어, 차라리 기성교회를 거칠게 비판하는 이단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 이단을 찾는 것이 아닐까?
 
둘째로, 아무리 노력해도 소위 흙수저밖에 잡을 수 없는 (불평등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하루하루 겪는) 청년들이, 주어진 운명을 천지개벽하듯 바꾸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이단을 찾는 것은 아닐까?
 
청년실업문제가 고통스럽다고 하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조차 제시하지 못하는 기성세대 지도자들이 가득하고, 청년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하면서도 재빠른 손익계산으로 자기 잇속만 차리는데 능숙한 정치인들이 판치는 세상을, 한 번에 뒤집어 바꿔버리고 싶은 욕구가 청년들로 하여금 이단에게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셋째로, 밖으로는 평안하고 평온한 집으로 비춰지지만, 실제로는 통제와 차별과 폭력과 무료함이 곳곳에 숨어있는 집이라면, 그래서 하루하루 탈출을 모색하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들이 있다면, 그러던 중 집에서 결코 느끼지 못하는 정과 돌봄을 이단단체 안에서 경험한 후, 차가운 집을 떠나 따뜻하고 푸근한 이단의 품을 찾으려는 이들이 있다면, 이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혹시 불만족스러운 가정에서 불편하지만 안전하게 사는 것보다, 설령 이단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행복과 따뜻함을 느끼며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이단이 문제라면, 교회가 답이라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이단 피해가 문제라면, 가정 회복이 답이라는 믿음에도 변함은 없다.
 
2천년 교회역사에서, 이단은 예외 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해왔지만,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단 한 차례도 넘어지지 않고 승리해왔던 것도 분명히 기억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이단들에 대한 최후의 승리는 우리 주님의 것이라는 점도 믿는다.
 
하지만 교회가 더 많은 소유와 양적성장에 집착하는 동안, 가정을 버리면서까지 이단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해가는 교회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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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가정도 포기하는 이단, 소유에 집착하는 교회에게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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